본문 바로가기

병자호란

병자호란 다시 읽기(72)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인조는 나름대로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자책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를 반포하여 실책을 사과하고, 내외 신료들에게 구국의 방책 마련을 위해 협조를 당부했다. 신료들도 인조의 호소에 답하여 이런저런 개혁안과 방책..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71)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홍타이지의 ‘조선 비난’ 국서에 조정신료 決戰論 들끓어 몽골 버일러들을 이끌고 왔던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청과 관계를 끊겠다는 인조의 유시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뒤 조선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나덕헌과 이확이 홍..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70)홍타이지 황제가 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황제가 되다 평소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금의 힘이 이미 명마저 넘어선 상황에서 조선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중..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9)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다목적 사절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사절이자, 인열왕후의 죽음에 문상하기 위한 조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동참을..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8)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7)유화적인 대일정책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6)유화적인 대일정책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6) 유화적인 대일정책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5년 후반 무렵, 조선은 또 다른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일본 문제’였다. 조선은 갈수록 높아지는 후금의 군사적 위협과 명의 요구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처지였다. 당연히 일본과의 관계 안정이 절실했다. 그..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5)전란의 전조(前兆) [병자호란 다시 읽기] (65) 전란의 전조 1634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정은 강학년(姜鶴年) 발언의 파장 때문에 뒤숭숭했다.‘포악함으로써 포악함을 제거했다.’며 인조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했던 강학년의 직격탄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실정(失政)을 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