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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두류실/두류실 일기

[비망록]성년의 날

성년의 날

 

어저께 퇴근 무렵, 휴대전화에서 뽀르롱하는 소리가 들린다. 또 귀찮은 스팸성 문자 메시지가 왔나 하고 전화기를 열어보니 뜻밖에 딸아이가 보내온 것이다. 내가 서울생활을 하며 떨어져 있을 때, 제 일상을 전하거나 아니면 안부를 묻는 것은 자주 받았지만, 최근 부산 집으로 내려와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오늘 성년의 날. 아빠 딸 성년이 됨.ㅋ 저 올해 투표도 함.ㅋ

향수와 장미꽃 선물 기다리고 있겠슴.ㅋ

 

화면의 내용은 그러하다. 라는 자음을 연속 넣은 것을 보니 저도 작정을 하고 보내긴 했지만 조금은 겸연쩍은 모습이 눈에 잡힌다. 근데 이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웬 향수와 장미꽃? 향수와 담 쌓고 사는 나더러

 

사무실의 직원들에게 그 상황을 물어보니, 

요즈음 남자친구에게서 그걸 받는다고 하던데, 아마 고운이는 남자친구가 없는 가보죠.ㅎㅎ

 

곧 이어 나의 반격은 바로 시작된다.

, 이 바보야. 그 건 남자친구에게서 받아야지. 왜 아빠보고 달라고 해!

 

다시 또 날라 온 메시지 내용,

남자친구 없으니 아빠가 반드시 챙겨줘야 함

 

월요일 저녁, 사무실 인근의 시민회관에서 상영하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 수상작인 크래쉬를 함께 보러 가기로 한 직원들과의 약속은 이런 이유로 깨어지고 만다. 아니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딸아이와 약속을 하게 된다.

 

1시간이 지난 시각, 해운대의 어느 화장품 가게에 선 부녀.

 

시종 생글생글하는 딸아이와는 대조적으로 늙수그레한 얼굴에 두툼한 가방을 든 나는 너무나 어색한 모습이다.

 

대화 내용을 잘 주어 담지는 못했지만 향수는 명품 밖에는 없단다. 대 여섯 개의 샘플을 이리저리 보고 냄새를 맡고 하던 딸아이의 손에는 어느 듯  만지작거리는 게 하나 들려 있다.

 

페르가모”…

 

아이의 손길에 의기양양한 주인 아저씨의 반응을 보면 딸아이가 제대로 골랐던 지, 아니면 내가 제대로 걸렸던 지, 두 가지 중의 하나, 아니 같은 말일 터.

 

, 꽤 오래 여기서 장사를 해왔는데, 아빠한테 향수 사달라 해서 이렇게 함께 오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잘 되었다는 이야기인지, 잘 못되었다는 이야기인지

아무튼 그렇게 해서 1차 상황은 종료된다. 

 

근데, 딸아이는 제 오빠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빠가 향수 샀으니 오빠는 장미 가져오라는 이야기로, 군복무 마치고 2학기에, 2학년으로 복학할 아들과 지금 2학년인 딸이 문자로 전화로 서로 티격태격이다

 

부녀와의 1차 회동에 이어 뒤에 합류한 제 엄마와 큰아이의 항의가 사뭇 거세다.

 

말하자면 큰 놈 성년의 날 때는 전화 한번 안 해 주더니만, 왜 딸에게만 이러느냐라고 모자가 작심을 하고 따지는 일이다.

 

'참, 나, 낸들 뭘 아냐고'라는 소리가 나오려다가, 나는 짐짓 여유로운 웃음을 날리며 '흠흠' 거리며 그 상황을 즐기게 되고 만다.

 

곧 아르바이트 한다는 아들아이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동생한테 거의 각서 수준의 약속을 했나 보다. 연신 까르르 대는 딸아이의 웃음 따라 온 가족의 마음도 모처럼 열렸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이 듣기 싫어할 줄 알지만, 나는 슬그머니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성인, 책임감이라는 이야기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어제 만남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도 저네들의 생각과 계획이 있다는 확인을 할 수 있었고, 또 듣는 자세가 그렇게 진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중요한 것은 막내 어리광쟁이 딸아이가 어른이 되었단다.

 

아직도 삶의 오롯한 바른 줄 하나 잡지 못하는 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어른 같지 않은 내가, 그렇게 어른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던 시간은 이렇듯 불쑥 내게 의미를 주는데,

나는 왜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일까

 

모처럼 좋은 느낌으로, 긴 생각에 빠져 본 밤 시간이었다.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