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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문화재 이야기(9)조선백자 기름받이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9) 조선백자 기름받이

TV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 국왕이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종종 고려청자가 등장합니다.

조선시대라도 국왕이라면 귀한 청자 술병과 술잔쯤은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조선왕조로서는 고려청자가 이어받아야 할 유산이라기보다는 극복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소품 담당자가 잘 몰랐던 탓이겠지요.

고려를 무너뜨리고 일어선 조선의 지배층에게 화려한 고려청자는 과거의 소수 귀족이 자행한 부패의 산물로 낙인찍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가 앞장서 장려한 백자에는 구시대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백성들에 대한 정치적 약속이 담겨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장식을 배제하고 덤덤하게 절제와 품격을 드러내는 조선백자는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이념의 형상화니, 선비다운 절조와 자부심이니 하고 다양한 의미가 부여됐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백자에도 서민적인 생명력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소탈하고 재미있다는 것이 조선 후기 백자가 가진 특징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지만 백자 기름받이는 그런 단계를 훨씬 뛰어넘은 듯합니다.

여성의 신체곡선과 가장 닮았다는 고려청자 매병(梅甁)의 풍만한 어깨선조차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기름받이는 젊은 여성의 가슴을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했습니다.

기름받이란 글자그대로 등잔 아래 걸어 두어 심지에서 떨어지는 기름이나 찌꺼기를 받는 데 쓰는 일종의 그릇입니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노끈을 달아 등잔대에 매달 수 있도록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지요. 처음엔 쇠뿔을 자른 뒤 속을 파내어 만들기도 했지만, 오래 쓰면 기름 얼룩이 지워지지 않아 나중엔 백자로 만든 것이 유행했습니다.

백자 기름받이는 침을 뱉는 그릇과 비슷한 모양의 타구형(唾具形)도 있었다지만, 유방형(乳房形)이 더욱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가슴 모양의 기름받이는 뒤집어 보지 않고 등잔대에 제대로 걸어 두었을 때는 형태의 사실성을 별반 느낄 수 없다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도공은 어떻게 하면 막 성숙한 여인의 가슴과 똑같이 빚을까 고심했겠지만, 쓰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꼭 기름받이를 염두에 두고 한 얘기는 아니겠지만,“중·후기 백자는 간결·소탈하고 단정·정직하며 유머와 해학이 있다.”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설명은 그래서 돋보입니다.

나아가 가슴 모양으로 빚은 조선백자 기름받이는 등잔대가 쓰여질 절조 있는 선비의 사랑방이나, 마당 깊은 안채에서도 본연의 자연스러운 인간미를 잃지 말라는 익살 속에 교훈을 담아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dcsuh@seoul.co.kr

기사일자 : 2007-03-08    25 면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