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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그림 속에 노닐다/오주석[書評모음]

그림 속에 노닐다
오주석 지음,
오주석 선생 유고간행위원회 엮음,
솔출판사,
216쪽, 1만3000원

“초승달 지는 깊은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도포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긴 갓끈은 멋들어지게 어깨에 걸쳤는데 마음은 진작부터 초롱불 속처럼 뜨듯해서 발끝이 벌써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혜원 신윤복(1758∼?)의 ‘월하정인도’를 두고 오주석(1956∼2005) 선생은 이런 해설을 붙였다. 여인에 대해선 “아마도 함께 갈 낌새지만 안 그럴지 행여 알 수 없다”라고 썼다. 신문에 연재한 이 글을 보고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취미’라는 독자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달의 모양으로 보면 그림 속 시간은 한밤이 아니라 새벽녘이 맞다는 지적이었다. 글 쓰기 전 이미 대전의 국립천문대에까지 연락해 초승달임을 확인했던 치밀한 저자였건만 그림 속 장면을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으로 고쳐 써야 했다.

“조각달이 낮게 뜬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마음은 여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건만 발끝은 하릴없이 갈 길을 향하고 있다…한편 여인은 치마를 묶어 올려 하얀 속곳이 오이씨 같은 버선 위로 드러났다. 함께 갈 수 없는 길, 그러나 마음만은 님의 품 안에 있다”라고.

함께 나눠 더욱 즐거운 그림읽기 얘기다. 호암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연구원을 지내며 좋은 그림을 실컷 보고 연구한 저자는 대중을 위한 글쓰기와 강연에 힘을 쏟았다. 여러 직업군의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생활인이 체득한 지혜를 즐겨 받아들였다.

집이 더 이상 집이 아닌지 오래이듯, 요즘은 그림도 그냥 그림이 아니다. 부동산이고 주식이다. 생전에 오 선생은 이렇게 개탄했다. ”뛰어난 그림은 화가 혼자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인의 총체적 삶의 결정(結晶)이다. 다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정말 훌륭한 예술품을 가질 만한가 하고….”

“달도 기운 야삼경,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 신윤복은 몽롱한 달빛 속 연인의 연정을 흐드러진 필치로 이렇게 적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135호 ‘월하정인도’다.
저자는 3년 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떴다. ‘미완의 대기(大器)’라며 그의 재주를 아쉬워한 지인들이 유고를 엮었다. 덕분에 그림을 그림답게 보는 책을 만났다.  

저자는 변상벽의 ‘모계영자도’에서 도타운 모정을, 이명기의 ‘채제공 초상’에서 한 나라 재상의 진실성을 읽는다. 그림이 정겨워 눈 씻고, 글이 절묘해 한 번 더 눈 씻으니, 마음이 한층 맑아진다. 빛나는 책은 독자들이 더 잘 알아본다.

그의 저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2』 『한국의 미 특강』 등은 예술서로는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다.

권근영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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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술사가의 ‘넉넉한 가슴’과 만나다
그림속에 노닐다 / 오주석 지음 / 솔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깊이와 넓이 그리고 대중적 친화력을 함께 갖고 있는 미술사학자 오주석(1956~2005)의 독화수필(讀畵隨筆), 자유롭게 써내려간 그림읽기다. 그의 3주기를 맞아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 등 생전에 오주석을 아꼈던 사람들이 그의 주옥 같은 글을 모았다. 이 책을 통해 그의 그림읽기의 뼈대있는 깊이와 넓이, 자유로운 정신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되지만 더욱 감탄스러운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열린 정신이다.

그는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오른쪽 사진)’에 대해 한 신문에 “초승달 지는 깊은 밤 한껏 차려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 무슨 일일까? 다소곳하게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은 수줍음 반, 교태 반 야릇한 정이 볼에 물들었다”고 쓰고 “남자 마음은 진작부터 초롱불 속처럼 뜨듯해서 발끝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여인은)함께 갈 낌새지만 안 그럴지도 행여 알 수 없다” 등 ‘오만가지 상상을 덤으로 펼쳤다’.

그랬는데 한 독자가 “한밤중에 초승달이 이런 모양으로 뜨려면 천지개벽이 있어야 한다”며 “그림 속의 달은 해가 뜨고 날이 밝아진 이후 동편에 떠오른 초승달”이라고 지적했다. 독자의 말 대로라면 그의 그림읽기는 완전히 틀린 것이 된다. 이미 밀회가 끝나고 행여 누가 볼세라 조심스럽게 헤어지면서도 잔정이 남아 발이 떨어지지 않는 형국인 것이다.

그는 그림을 놓고 며칠을 고민한 다음 독자의 지적대로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이라는 것을 인정, ‘초승달 지는 깊은 밤’을 ‘조각달이 낮게 뜬 밤’으로 바꿨다. ‘마음은 진작부터…’를 ‘마음은 여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건만 발끝은 하릴없이 갈 길을 향하고 있다’로, ‘아마도 함께…’는 ‘함께 갈 수 없는 길, 그러나 마음만은 님의 품 안에 있다’로 고쳐썼다.

그리고 ‘(독자의 의견을) 어떻게든 모면을 해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온전히 승복하고 텅 비운 맘으로 받아들이고 보니, 입에 쓴 약이 정말 몸에는 좋다는 식으로 오히려 ‘월하정인도’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소중한 열쇠를 얻은 셈이 됐다. 더구나 덤으로 화가 신윤복의 섬세한 예술가적 감성까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 독자의 관심어린 한마디가 글쓰는 이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절감하게 됐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과즉물탄개(過卽勿憚改·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친다)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인도 아니고 학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180도 뒤집기는 정말 힘들다. 그것도 비전공 아마추어 독자의 의견에 승복하기는 정말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공자의 과학적 실험결과조차도 부인하는 등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는 바로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같은 인물의 그림을 다른 사람으로 보아온 관행을 고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서양의 사실주의적 원근법에 비추어 한국의 비사실적인 역원근법이 얼마나 인간중심적인지 사례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했다. 그가 강조하는 그림읽기의 어려움과 주안점은 학문과 인간으로 넓혀져 과연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준다.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문화일보]

기사 게재 일자 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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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숫물 소리 듣는 행복'을 즐기다
  • 그림 속에 노닐다
    오주석 지음|솔|215쪽|1만3000원
  •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시간 : 2008.04.18 14:26 / 수정시간 : 2008.04.18 14:29

    • 호암미술관 전시회에서 〈이채(李采) 초상〉을 마주친 저자는, 그림 속 조선 후기 문신의 강렬한 눈빛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왠지 미술 교과서에도 실린 그림인 〈전(傳) 이재(李縡) 초상〉이 자꾸 떠올랐다. 이재는 이채의 할아버지였다. "두 사람이 닮은 것은 당연한 일인데…. 아니, 잠깐! 두 그림은 모두 단 한 사람의 기운을 보여주고 있잖아? 같은 사람이다!" 그는 둘 다 이재의 초상화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학계는 냉랭했다. "주석이 자네, 너무 고집이 세." 그는 미술해부학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두 초상화의 왼쪽 눈 4시 방향 눈가 아래쪽 불거져 나온 부분은 노화 현상에 의한 지방종(脂肪腫)인데 아무리 할아버지와 손자가 닮았다고 해도 이 부분까지 같기는 어렵다"는 판정을 얻어냈다. 저자는 말한다. "바로 보기의 어려움은 시력과 관찰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보는 사람의 생각, 마음, 영혼의 과제인 것이다."

      일찍 세상을 떠나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인물 중 하나가 이 책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오주석(吳柱錫·1956~2005)이다.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한국의 미 특강》 등 독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던 책들에 이어 나온 이번 유고집은 그가 생전 꼭 내고 싶어했다는 '독화(讀畵) 수필집'이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얼굴'을 포기하고 있는 지금의 세태를 한탄하고, 그림 감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만큼만 보이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적는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등장하는 사제간의 정을 짚다가도, 저 좋아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낙숫물 소리 듣는 행복'에 비한다.

      이 유고집의 편집은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 강관식 한성대 교수 등 9명으로 구성된 유고간행위원회가 맡았다. 강우방 원장은 책 말미에 실린 추모글에서 저자를 '미완의 대기(大器)'라 부르며 "한국 회화사의 새로운 장(章)을 열어놓은 채 그는 갔지만 누군가가 그 맥을 이어주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