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 터 발굴 현장에서 금병.은병.청동함 등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를 공개했다. 1400여 년 전 것임에도 보존 상태가 거의 완벽했다.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들어 있었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 7.9㎝)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세 겹의 사리기 안에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청동사리함 몸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라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걸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학계의 일반적 추론과 달리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절임이 밝혀졌다.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사리기는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가로 100㎝, 세로 110㎝) 밑에 별도로 깔린 사리 안치용 넙적돌에 뚫린 작은 구멍(사리공) 안에 담겨 있었다. 이는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은 뒤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라 백제시대 사리 봉안수법과 목탑 축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김연수 전시홍보과장은 "금.은.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기가 발견된 것,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 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것 등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 전환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루빨리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고 교과서 수록을 검토해야 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사리장치 주위에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8000여 개의 구슬과 목걸이, 팔찌, 비녀, 금귀고리, 옥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 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 추정 시설도 확인됐다. 남북 길이 62m, 동서 너비 13m다. 권근영 기자 ☞◆사리장엄구, 사리기=사리장엄구는 부처의 유골인 사리를 담는 사리기부터 함께 납입되는 각종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사리에서 탑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것을 말한다. 이중 사리기는 금.은.동.철.나무.돌 등 여러 재료로 만든다. 사리를 정성 들여 봉안하고자 안으로 갈수록 귀한 재질을 이용해 삼중.사중 등 여러 겹의 사리기에 사리를 안치했다. |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충남 부여의 왕흥사터 발굴사업이 시작된 것은 2000년부터다. 2007년까지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올해 4월 목탑지의 윤곽이 파악됐다.
발굴조사를 담당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김용민 소장은 "6월 말까지 목탑의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을 발견하지 못해 사리장치를 발견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굴 성과가 컸던 그동안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백제 황금사리병도 우연한 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7월 초 장마를 대비해 발굴현장 주변의 배수로를 정리하던 굴착기의 삽 끝에 평평한 돌 하나가 걸렸다.
"심초석은 아닌 데 위치가 딱 심초석이 있을 자리였습니다. 또 주변의 진단구에서 도난당하지 않은 유물들이 발견됐어요. '이거 사리공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장마철을 피하기 위해 목탑지를 다시 흙으로 덮고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도굴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다.
9월 말. 장마가 물러나자 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은 보물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목탑지 부위를 다시 파내려 갔다.
10월 9일. 외부 행사로 자리를 비운 김 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발굴팀 김혜정 연구원이 "소장님 사리공 뚜껑이 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10분 뒤 다시 한 번 김 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리공 안에서 청동사리함이 발견됐다는 보고였다.
발굴팀은 그날 밤 청동사리함의 몸체에 새겨진 명문의 90% 가량을 해독했다. '찰(刹)'자와 '망(亡)' 자 등 몇몇 글자의 판독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유년 이월십오일 백제왕 창(丁酉年 二月十五日 百濟王 昌)'이라는 글자를 판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김 소장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흥사 창건 연대가 실제보다 23년 늦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금석문 자료야말로 확실한 자료입니다. 이런 증거가 나오면 문헌사학자들은 꼼짝 못하죠"라며 당시의 통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1천400년 동안 닫혀있던 청동사리함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뚜껑과 몸체 사이에 미세한 점토가 꽉 차있었던 것.
그러자 상급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과학팀이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약품을 이용해 뚜껑을 여는 방법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졌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방법은 고무렌치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고무 집게 2개로 뚜껑과 몸체를 잡고 힘을 줘서 여는 방법이다. 굳게 닫혀 있던 뚜껑도 이 단순한 방법 앞에 1천400년의 신비를 드러냈다.
뚜껑을 열자 은제사리외병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국내 최고(最古)이자 유일한 백제 황금사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제 유물과 관련해 1993년 금동대향로 발굴 이후 최고의 발굴성과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kind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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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10.25 01:54 / 수정 : 2007.10.25 02:24
- 국내 최고(最古)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와, 사리를 담은 각종 용기 등 장식품)가 나온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는 금제 장식품(위쪽)과 형형색색의 구슬들(아래쪽)이 함께 출토됐다. 크기는 1㎝ 내외지만 백제인의 예술혼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명품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발굴 결과 왕흥사는 서기 577년에 세워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출토된 구슬 8000여 점 등 발굴 유물 전체를 공개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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