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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 만에 모습 드러내다

1400년 전 백제 사리기 나왔다 [중앙일보]
`정유년 2월 15일 … 사리 두 매가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
왕흥사 터서 금·은·동 형태로 발견
백제 사찰인 충남 부여 왕흥사 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最古)의 사리기(左). 왼쪽부터 황금 사리병과 이를 담은 은제 사리외병, 청동사리함. 사리함 몸체에는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로 해석된다. [문화재청 제공]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터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舍利器)가 나왔다. 백제 때 사리기 일습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계에선 신라에 비해 자료가 크게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 터 발굴 현장에서 금병.은병.청동함 등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를 공개했다. 1400여 년 전 것임에도 보존 상태가 거의 완벽했다.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들어 있었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높이 10.3㎝, 폭 7.9㎝)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세 겹의 사리기 안에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청동사리함 몸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라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년)에 낙성된 걸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위덕왕의 선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학계의 일반적 추론과 달리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든 절임이 밝혀졌다.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사리기는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가로 100㎝, 세로 110㎝) 밑에 별도로 깔린 사리 안치용 넙적돌에 뚫린 작은 구멍(사리공) 안에 담겨 있었다. 이는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은 뒤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라 백제시대 사리 봉안수법과 목탑 축조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 김연수 전시홍보과장은 "금.은.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기가 발견된 것,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 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것 등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 전환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루빨리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고 교과서 수록을 검토해야 한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사리장치 주위에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8000여 개의 구슬과 목걸이, 팔찌, 비녀, 금귀고리, 옥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 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 추정 시설도 확인됐다. 남북 길이 62m, 동서 너비 13m다.

권근영 기자


☞◆사리장엄구, 사리기=사리장엄구는 부처의 유골인 사리를 담는 사리기부터 함께 납입되는 각종 공양품에 이르기까지 사리에서 탑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의 것을 말한다. 이중 사리기는 금.은.동.철.나무.돌 등 여러 재료로 만든다. 사리를 정성 들여 봉안하고자 안으로 갈수록 귀한 재질을 이용해 삼중.사중 등 여러 겹의 사리기에 사리를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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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이 죽은 왕자 위해 절 세우고 묻어
부여 왕흥사터에서 발굴된 백제 금·은·동 사리장엄구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사진은 금·은·동 사리기 일괄
정확히 1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됐다.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사리를 담는 사리기를 비롯해 탑에 안장되는 각종 공양품을 일컫는 말)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 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금·은·동 사리 사리장엄구 일체가 한꺼번에 발견된 셈이다.

특히 청동 사리함(높이 10.3㎝)의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졌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풀이하면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가 된다.

 
  사리함 명문 기록.연합뉴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에 근거해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 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또 왕흥사가 능산리사(567년 축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 축조양식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금·은·동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발굴성과"라고 평가했다.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한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픔, 관모장식을 비롯해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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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지 황금사리병 어떻게 발굴됐나>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충남 부여의 왕흥사터 발굴사업이 시작된 것은 2000년부터다. 2007년까지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올해 4월 목탑지의 윤곽이 파악됐다.

   발굴조사를 담당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김용민 소장은 "6월 말까지 목탑의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을 발견하지 못해 사리장치를 발견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굴 성과가 컸던 그동안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백제 황금사리병도 우연한 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7월 초 장마를 대비해 발굴현장 주변의 배수로를 정리하던 굴착기의 삽 끝에 평평한 돌 하나가 걸렸다.

   "심초석은 아닌 데 위치가 딱 심초석이 있을 자리였습니다. 또 주변의 진단구에서 도난당하지 않은 유물들이 발견됐어요. '이거 사리공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장마철을 피하기 위해 목탑지를 다시 흙으로 덮고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도굴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다.

   9월 말. 장마가 물러나자 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은 보물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목탑지 부위를 다시 파내려 갔다.

   10월 9일. 외부 행사로 자리를 비운 김 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발굴팀 김혜정 연구원이 "소장님 사리공 뚜껑이 보입니다"라고 보고했다. 10분 뒤 다시 한 번 김 소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리공 안에서 청동사리함이 발견됐다는 보고였다.

   발굴팀은 그날 밤 청동사리함의 몸체에 새겨진 명문의 90% 가량을 해독했다. '찰(刹)'자와 '망(亡)' 자 등 몇몇 글자의 판독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유년 이월십오일 백제왕 창(丁酉年 二月十五日 百濟王 昌)'이라는 글자를 판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김 소장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흥사 창건 연대가 실제보다 23년 늦다는 것이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금석문 자료야말로 확실한 자료입니다. 이런 증거가 나오면 문헌사학자들은 꼼짝 못하죠"라며 당시의 통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1천400년 동안 닫혀있던 청동사리함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뚜껑과 몸체 사이에 미세한 점토가 꽉 차있었던 것.

   그러자 상급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과학팀이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약품을 이용해 뚜껑을 여는 방법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졌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방법은 고무렌치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고무 집게 2개로 뚜껑과 몸체를 잡고 힘을 줘서 여는 방법이다. 굳게 닫혀 있던 뚜껑도 이 단순한 방법 앞에 1천400년의 신비를 드러냈다.

   뚜껑을 열자 은제사리외병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국내 최고(最古)이자 유일한 백제 황금사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제 유물과 관련해 1993년 금동대향로 발굴 이후 최고의 발굴성과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kind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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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계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
  • 왕흥사터 백제 사리함에서 금장식·구슬 등 수천점 나와
  • 부여=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입력 : 2007.10.25 01:58 / 수정 : 2007.10.25 02:26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완형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가 1430년 만에 발굴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부여 왕흥사터 목탑 기초(심초석·心礎石) 부분에서 서기 577년(위덕왕 24년)에 제작해 넣은 사리장엄구와 각종 장식품 등을 발굴했다”며 “온전한 모습을 갖춘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굴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등 전문가들은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왕흥사터 목탑은 예전에 사라졌지만 발굴 결과, 가로 세로 14m에 이르던 장대한 탑이었다. 사리장엄구는 청동으로 된 사리합(직경 7.5㎝, 높이 8㎝) 안에 은으로 된 사리병을 넣고, 그 안에 다시 금으로 된 사리병을 담은 ‘3중 세트’ 형식이었다. 이 중 청동 사리합 몸체에는 한자를 29자 새겼다. 내용은 “정유년(577년) 2월 15일, 죽은 왕자를 위해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절을 세웠다. 사리를 2매 넣고자 했는데, 부처님의 조화로 사리가 셋이 됐다”(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였다. 백제 왕의 이름이 적힌 유물(명문·銘文)이 발굴된 것은 무령왕릉 출토품(1971년 발굴)과 역시 창왕의 이름이 적힌 사리감(사리를 안치한 용기·1994년 발굴) 이후 세 번째이다.
    • ▲ 청동사리합 바깥 부분에 적힌 명문(銘文). /문화재청 제공
    • 이 명문으로 인해 ▲왕흥사터 사리장엄구는 삼국 최고(最古)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에 창건됐고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아좌 태자 외에도 577년 즈음에 사망한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사실 등이 새로 밝혀졌다.

      사리장엄구 주변에서는 각종 금 장식과 귀고리, 액막이(진묘수·鎭墓獸)형 장식, 구슬 등 진단구(鎭壇具·건물을 세울 때 액을 막기 위해 넣는 것)도 나왔다. 출토된 구슬은 낱개로 8000점이 넘는다.
    • ▲ 1430년 만에 햇빛을 본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청동사리합(맨 뒤) 안에 은제 사리병(가운데)을 담고, 그 안에 다시 금제 사리병을 넣었다. 청동사리합에는 백제왕 창(昌·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장엄구를 넣었다고 기록했다. /부여=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 위덕왕(재위 554~598)은 45년간 백제를 통치했지만, ‘가족사’는 불운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왕자 시절 고구려 장수를 베고 병사와 함께 침식했던 용감하고도 다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를 이끌던 자신을 위로하고자 출병했던 아버지 성왕이 매복한 신라군에게 살해되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즉위(30세)했다. 53세 즈음에 아들이 죽는 아픔을 겪었던 그는 왕흥사 목탑 사리장엄구를 둬 아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했다. 위덕왕의 사후, 그의 아들들은 왕위를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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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입력 : 2007.10.25 01:54 / 수정 : 2007.10.25 02:24

    • 국내 최고(最古)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와, 사리를 담은 각종 용기 등 장식품)가 나온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는 금제 장식품(위쪽)과 형형색색의 구슬들(아래쪽)이 함께 출토됐다. 크기는 1㎝ 내외지만 백제인의 예술혼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명품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발굴 결과 왕흥사는 서기 577년에 세워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출토된 구슬 8000여 점 등 발굴 유물 전체를 공개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