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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금 답사일지/☞자료모음

[백두대간 고개]죽령

 

▣소백산 죽령 옛길

영남 지방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죽령 옛길의 연혁은 분명하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을 넘는 해발 689m의 죽령길이 처음 열린 때는 신라 아달라 이사 금 5년. 서기로 치자면 158년의 일이다. 셈해 보자면 지금으로부 터 1848년 전이니 아득한 세월의 저편이다. 신라, 고려, 조선시 대를 거치면서 경상도 동북 일대에서 서울 나들이를 하자면 이 고 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 수많은 세월을 뛰어넘어 길은 아직 살아 있다. 이렇듯 생명력이 긴 고갯길이 또 있을까.

 

죽령 길은 일제시대이던 1941년 청량리 ~ 경주까지의 중앙선 철 로가 놓이면서 쓰임새를 잃기 시작했다. 소백산을 휘감아서 오르 는 똬리굴로 열차가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걸어 넘던 죽령 고갯길 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죽령 옛길의 들머리 희방사역의 역무원 남조운(41)씨는 “중앙선 열차는 경북 영주며 안동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가던 소통로였다”며 “이런 탓에 과거 안동이나 영주에 서 상경한 사람들은 대부분 청량리 역 근방에 정착했다”고 말했 다. 지금도 이들 지역 향우회는 십중팔구 청량리역 일원에서 열 린다고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옛길 옆으로 소백산 자락을 타고넘는 5번 국도 가 뚫리면서 철로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과거 청량리 역에서 출 발해 강릉으로 가는 열차는 소백산을 넘어 영주까지 내려가 동해 안 쪽으로 붙었는데, 지금은 아예 죽령 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냉 큼 태백선으로 연결돼버렸다. 5번 국도는 다시 지난 2001년 개통 된 중앙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줬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4.6㎞에 달 하는 죽령터널이 뚫리면서 구비구비 한나절을 걸어넘던 죽령길은 이제 2분도 채 걸리지 않는 터널길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이 렇게 끊임없이 새길이 생겨나면서 옛길을 덮었지만, 그래도 옛길 은 오롯이 살아남아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길로써의 쓰임 새는 잃었지만, 오래된 과거로 들어가는 입구로써의 효용성을 아 직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 옛 길을 설렁설렁 걷는 맛 희방사 뒤쪽, 중앙고속도로의 거대한 교각 밑을 지나 사과밭 사 이 몇개의 장승을 만나면서 죽령 옛길은 시작된다. 옛길은 외양 으로 보자면 평범한 등산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길 양쪽으로는 잘 조림된 낙엽송들이 도열하듯 서있다. 낙엽송은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벌목이 이뤄졌던 탓인지 아쉽게도 1800여년 세월의 흔 적을 짚어볼 만한 거목들은 없다. 대신 옛길을 걷다가 가끔 발길에 채는 초록이끼로 뒤덮인 돌에서 1800여년의 시간을 본다. 죽령 옛길의 하이라이트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다가 고개가 시작될 즈 음 나타나는 돌담들이 즐비한 주막터. 이곳의 주막들은 먼길을 떠난 나그네나 장돌뱅이, 혹은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로 번성했 으리라. 길손들은 이곳에 모여앉아 막걸리 한잔을 들이켜며 객고 를 풀고, 지나온 마을에 대해서 호롱불 밑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를 나눴으리라.

 

고갯길 곳곳에는 과거 죽령과 얽힌 여러가지 설화나 역사적 사실 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서있다.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퇴계 이황이 형인 충청감사 이해와 헤어졌던 사연이며, 소백산에서 암약하던 산적들을 물리친 다자구 할머니에 대한 전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오래된 길이 가진 이야기들은 풍성하고, 또 드라마틱하다.

 

영주 쪽 죽령길은 10여년 전에 새로 정비한 것. 영주문화원의 길인성 사무국장은 “길이 뚫릴 당시 죽령은 고구려와 백제를 연 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며 “당시 옛길은 지금보다 훨씬 더 험해 산적들이 자주 출몰했다”고 말했다.

 

옛길은 정상 쪽에서 5번 국도와 만난다. 막걸리와 이것저것 안주 를 파는 ‘죽령주막’(054-638-6151)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다 시 단양 쪽으로 옛길을 짚어가며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쪽 내 리막길을 따라간다. 이쪽은 길이 흐려지면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는 데다 거대한 죽령터널의 환기굴뚝을 만나 운치는 덜 하지 만, 감나무들이 심어진 산골 마을의 집들을 이리저리 휘돌아 내려 가는 맛이 있다.

 

# 소백산 탄산수로 빚은 깔끔한 맛의 막걸리 한 잔 단양 쪽으로 내려서는 길은 용부원리를 거쳐 대강면소재지에 닿 는다. 면소재지에는 막걸리를 빚어내는 소백산 술도가가 있다.

 

일제시대 때부터 운영돼오던 양조장을, 충주의 수안보 일대에서 4대째 술을 빚어오던 조국환(70)씨가 1979년에 사들여 20년이 넘 도록 ‘대강막걸리’를 빚어내고 있다. 지금은 도회지의 대기업 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 조재국(42)씨가 대를 이어 술을 빚고 있다.

 

소백산 술도가에서는 지금도 70년된 항아리에 술을 빚는다. 소백 산의 탄산이 적당히 섞인 물을 끌어올려 술을 빚는데, 물맛이 워 낙 좋아 술맛도 뛰어나다. 이곳 막걸리의 특징은 텁텁한 맛 대신 깔끔한 맛을 낸다는 점. 밥알이 동동 떠있는 막걸리는 눈으로 보기에는 걸쭉한 느낌이지만, 입안에서는 맑게 넘어간다. 주변 사람들이 “막걸리 맛이 좋으니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면 잘 팔릴 것”이라고 부추겼지만, 조씨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 다. 전국적으로 유통시키려면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막걸리를 끓여서 소독해야 해야 하는데, 그러면 막걸리 맛을 내는 효모가 다 죽어버려 술맛이 나질 않는다는 것. 조씨는 “욕심내지 않고, 앞으로 그저 우리 술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팔 생각”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빚은 막걸리는 간혹 서울로도 보내진다. 서울에서 단양 이나 영주 출신의 동창회나 향우회 때는 어김없이 이곳의 막걸리 가 등장하곤 한다. 술맛이 알려지면서 청와대에서도 ‘대강 막걸 리’를 대서 마시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단양 일대를 방문해 막걸리 맛을 본 뒤부터 청와대 만찬 때마다 어김없이 ‘대강 막 걸리’를 내놓고 있다는 것. 조씨는 “처음 청와대 납품 제의를 받고는 술을 따로 빚어야 하나 고민했었다”며 “하지만 지금 이 대로 빚는 게 가장 맛이 좋다고 판단해 일반에 판매하는 똑같은 막걸리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가을색 완연한 죽령의 옛길을 타 넘은 뒤, 벌컥벌컥 들이켜는 막 걸리 맛. 수백년전, 수천년전 과거의 길을 짚어가는 여정에서 막 걸리 한 잔의 맛은 더 각별한 법이다.

 

[문화일보]

단양·풍기 = 박경일기자 parking@ 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