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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지리산 화개동 의신골




[05년 7월의 의신마을 앞 화개동천]


['월간 반야'의 오래 전 기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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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개동 의신골

계곡 물도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다. 주류의 물은 바위를 덮치면서 자신만만하게 흐르지만,  비주류는 옷고름을 입에 문 새악시처럼 큰 바위 뒤쪽 모퉁이를 감고 돌아 작은 웅덩이를 이루며 흐른다. 단풍잎도 주류를 타고 흐르는 것은 활기가 차지만, 비주류를 탄 단풍잎은 고여있는 물에 머리를 쳐박고 부질없이 몸을 적시고 있다.

삼정마을이 의신골의 끝 동네이다. 고즈넉한 동네에는 골바람을 타고 단풍잎이 삐라처험 흩날린다. 무언의 법회다. 마을 위의 빗점골에도 사람이 살았다지만 지금은 빈 풀밭이다. 빗점골은 빨치산 영웅 이현상이 생을 마친 곳으로 유명하다. 1948년 가을 이현상은 의신골로 들어가서 고독한 전투를 펼치다가 1953년 가을에 사살됐다. 의신사람들은 빗점을 가리켜 이현상이 물레방아를 돌려 전기를 일으켰던 곳이라 하여 발전소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개동 계류의 주류는 의신골에서 내려온다. 길은 계류를 따라 길게 이어졌다. 신라 적에는 고운 최치원이 거슬러 올라갔다가 되돌아오지 않은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15세의 나이에 의신골을 찾았다.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 청학의 둥지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 / 잘 가거라. 홍류동에 흐르는 물이여 / 너는 바다로 돌아가고 / 나는 산으로 돌아가려네.”

서산대사의 입산시다. 스님은 화개동의 의신골에서 출가했다. 그가 남긴 글에서, “삼철굴(三鐵屈)에 들어가 세 여름 안거를 지냈고, 대승사(大乘寺)에 들어가 두 여름 안거를 지낸 다음, 의신·원통·원적(圓寂) 등의 여러 암자에서 두서너해를 수도했다”고 말하고 있다. 원적암을 빼면 절은 전부 화개동 의신골 안에 있다.

“의신골은 ‘의신사(義神寺)’라는 절이름에서 유래한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정여창과 함께 지리산을 산행하며 쓴 『속두류록(續頭流錄)』에 의신사의 모습이 잠깐 나온다. “의신사는 평지에 있었다. … 도량에 들어서니 30여명의 승려들이 범패를 부르며 정진하고 있었다. 절의 둘레에는 대밭이 무성하고 동산에는 감나무가 있고 밭에는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 이 곳의 주지 법해(法海)는 학식이 높았는데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얼마 동안 쉬었다.”

지금 의신사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의신마을 뒤켠의 풀섶에 원통형의 부도 한기가 쓰려져 있는데 부도의 주인은 공교롭게도 김일손과 담소를 나누었다는 법해스님이다.

화개동의 물은 세석평전의 영신사(靈神寺)에서 발원해서, 의신사(義神寺)를 거쳐 신흥사(神興寺) 앞을 지난다. 의신골에 있었던 신(神)자 돌림의 세 절을 화개동의 삼신사라 불렀다. 삼신사는 의신골의 물가에서 번창한 절들이다. 계류가 쌍계사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만나섬진강으로 합류할 판인데, 쌍계사 물줄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절들이 즐비했다. 민가는 없고 절만 즐비한 골짜기였다.

서산대사가 32세의 나이에 당시 불가의 최고직이었던 선교양종판사가 되었으나, 직책을 사임하고 명산제찰을 편류하다가 다시 되돌아온 곳이 화개동의 신흥사였다. 불후의 명작이 된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신흥사 산내 암자였던 ‘내은적암(內隱寂庵)’에서 완성되었다. 내은적암터는 신흥마을의 왕성분교 뒷산 중턱에 있다. 서산대사는 내은적암을 중수하고 당호를 청허원(靑虛院)이라 짓고 스스로 청허라고 불렀다. 물러나 내은적암에 머무른다고 해서 호를 퇴은(退隱)이라 쓰기도 했단다.

신흥마을의 왕성분교가 신흥사터다. 신흥사터에는 큰 푸조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857∼?)이 심은 지팡이라고 한다. 고운은 신흥사터에 와서 물 가운데의 바위에 ‘세이암(洗耳岩)’이라는 글을 새긴 다음 귀를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는 물가의 언덕에 지팡이를 깊게 꽂아놓고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이 지팡이가 죽어 있으면 나도 이 세상에 없느니라”고 슬쩍 공갈을 치고 단풍나무 숲에 몸을 감추었다. 신흥사터의 푸조나무 지팡이가 왕성한 생명력을 피우며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최치원의 숨바꼭질은 햇수로 1000년을 넘기고 있는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속두류록』에 신선이 되어 아직도 지리산을 쏘다니는 고운의 일화가 나온다. “…조금 뒤에 한 사람이 흰 망아지를 타고 덩굴풀로 말뱃대끈과 고삐를 삼고 질풍같이 달려오는데 신흥사 앞의 외나무다리를 평지처럼 건너기에 모두가 어리둥절하였다. 절에 들어와 밤새워 이야기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그 이상한 사람은 최치원인데 아직 죽지 않고 청학동에 살고 있다.”

김일손은 신흥사 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면서 “이 이야기가 황당무계하지만 적어둘 만한 일”라고 덧붙였다.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는 9km의 아스팔트 길이다. 단풍의 극치는 단천계곡에서 맛볼 수 있다. 계곡은 대체로 단애의 바위산인데, 단풍이 서쪽햇살을 받아 밝고 활달하다. 마을은 계곡의 몸통부분에 선반처럼 달랑 얹혀 있다. 마치 단풍산이 그들의 축제를 위해 마련한 객석처럼 느껴진다. 계곡물은 가을 물이라 한없이 맑고 청아하다.


이현도 글. 월간반야 2002년 11월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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