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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통신

60년만에 밝혀진 억울한 영혼들

60년만에 밝혀진 억울한 영혼들
산청 외공리 유해발굴 현장 설명회
227구 유해 발견…남측 민간인 유품 나와
"카빈 소총으로 학생·부녀자 무차별 사살"
남병희 기자  

 진실화해위(위원장 안병욱)는 25일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학살 현장에서 유해발굴 현장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날 설명회에서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책임연구원)는 7월 18일 착수하여 8월 25일 현재까지의 발굴 현황을 설명, 외공 민간인 학살 사건의 경우 현재 매장지 확인 및 내부 노출 작업은 실측이 완료된 상태이며 유해를 수습 정리하는 작업이 남았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발굴작업은 당초 6기로 예측하였으나 실제로 5개의 매장지에서 22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5개의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류품은 군용 탄피 탄두 옷(천) 단추 허리띠 고무줄 지퍼 신발 숟가락 빗 구두주걱 잔 동전 유리조각 깡통 끈 멜빵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탄피와 탄두는 80개 이상의 탄피 가운데 권총탄피 3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카빈 소총용 실탄으로, 이곳에 왔던 군인들은 매우 정제된 부대였음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단추 천 허리띠나 지퍼 버클 신발 등으로 보아 이곳에 왔던 민간인은 당시 일반인의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유품은 단추 가운데 仁商(당시 인천상업학교) 京農(당시 경상농업학교) 金中 등의 명문이 있는 단추가 수습되었다. 단추의 수로 보아 교복을 입은 학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버클은 태극마크가 그려진 수상비행기가 양각되어 있고 그 우측에 korea haebang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외국인이거나 인민군이 아닌 남한사람의 소지품이 분명하다.


 은제 비녀는 정교한 꽃문양이 조각되어 평범한 것은 아니다. 한복을 입은 50대의 여성이 있었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유품이다.


 외공리 학살사건의 피해자는 현재까지 피해자의 신원을 알 수 있거나 적어도 이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확인할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가해자도 몇몇 증언이나 보도가 있었지만 사실 관계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외공리 민간인 학살사건은 발생 시점으로 모아 1950년 서울수복 이후 인공 치하에서 인민군에게 적극 협조하였거나 가담한 사람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작업이 1950년 후반부터 1951년 초에 걸쳐 여러 곳에서 자행되는 시기와 동일하다.


 외공리 민간인 학살사건의 발굴 책임자인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는 “발굴과 목격자 증언 자료 확보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고  이 작업과 동시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처리하며 향후 역사적으로 어떤 교훈을 가지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며 “비록 전시라 해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을 빌미로 수많은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하였다.
 
 
 ▲사진설명=25일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양민학살 현장에서 경남대학교 박물관의 주관으로 유족과 주민, 언론인등 100여명을 대상으로 유해발굴 현장 설명회가 개최됐다.

 

[경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