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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병자호란 다시 읽기(69)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다목적 사절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사절이자, 인열왕후의 죽음에 문상하기 위한 조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동참을..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8)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5)후금,조선을 떠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4)후금, 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조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명과 가도라는 바깥 변수 때문이었다. 유흥치가 피살된 뒤, 가도를 탈출하..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정묘호란 직후 조선은 후금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모문룡을 비롯한 한인(漢人)들의 비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후금 사자에 대한 접대나 그들과의 무역에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후금과의 우호 관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앍기(36)정묘호란 일어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후금군 파죽지세… 인조 강화로 피난갈 궁리만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