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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병자호란 다시 읽기(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 더보기
병자호란 이야기(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가도 정벌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자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병조판서 이귀가 나섰다. 그는 ‘주장(主將) 진계성을 함부로 살해한 유흥치를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바다 건너 정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중국 조정..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47)親明意識의 고양과 가도 정벌 [병자호란 다시 읽기] (47) 親明意識(친명의식)의 고양과 가도 정벌 모문룡을 제거한 이후 원숭환은 가도( 島)에 대한 정비 작업에 나섰다.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임시로 가도의 군병들을 지휘토록 하는 한편, 유해(劉海)를 시켜 진계성을 보좌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인 부총병 서부주(徐..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44)모문룡의 죽음과 파장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묘호란이 벌어지는 동안 모문룡은 조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보탬은커녕 그의 부하들이 끼친 작폐 때문에 청북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활약 덕분에 후금..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42)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정묘호란의 발생은 조선과 일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쓰시마(對馬島)와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는 동원할 수 있는 채널을 모두 가동하여 전쟁의 추이와 승패를 파악하려 했다. 그들은 조선과 후금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전쟁이 자신들에게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41)정묘호란의 후유증 [병자호란 다시 읽기]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청북에서는 의병들이 계속 저항하..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40)정묘호란과 모문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39)정묘호란 이모저모 [병자호란 다시 읽기]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인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 신료들은 대개 화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척화(斥..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