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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우리풀.꽃♧나무

배롱나무(백일홍나무,목백일홍)

 

장마가 끝난 여름날의 햇살은 쇠뿔도 녹이려 드는 땡볕이라 한다. 봄부터 햇빛에 잘 구슬려진 푸른 나뭇잎마저도 축 늘어져 버리는 계절이다. 이를 즈음 여름 꽃의 대명사 배롱나무 꽃은 비로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식물학적인 공식 이름은 배롱나무,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이름은 백일홍(百日紅)나무다. 백일홍나무를 조금 빨리 부르면 배기롱나무가 되니 배롱나무의 어원은 결국 같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붉다는 뜻의 홍(紅)이 들어갔으니 진분홍 빛 꽃이 기본이고 가장 흔히 만날 수 있다. 연보라 꽃도 가끔 있으며 흰 꽃은 비교적 드물다.

 

 배롱나무는 콧대 높은 미인처럼 자못 고고하다. 다른 나무들과 섞여서 살아남겠다고 아우성대지 않는다. 조용한 산사(山寺)의 앞마당이나 이름난 정자의 뒤뜰 등 품위 있는 길지(吉地)에 사람이 심어 주어야만 비로소 자람을 시작한다. 가지의 끝마다 원뿔모양으로 마치 커다란 꽃 모자를 뒤집어 쓴 듯이 수많은 꽃이 핀다. 굵은 콩알만 한 꽃봉오리가 나무의 크기에 따라 수백 수천 개씩 매달려 꽃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살포시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바글바글 볶아놓은 파마머리 마냥 온통 주름투성이 꽃잎을 6-7개씩 내민다.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도 타고난 주름을 펴주기에는 역부족이라 주름꽃잎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배롱나무는 잠깐 피었다가 금세 져버리는 대부분의 꽃들과는 달리여름에 시작하면 가을이 무르익어 갈 때까지 계속하여 핀다. 대체로 백일 쯤 핀다하여 백일홍(百日紅)이란 이름이 붙었다.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 풀 백일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과연 백일을 피어있는 것인가? ‘花無十日紅’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보통의 꽃은 피고 난 다음 열흘가기가 어렵다. 배롱나무라고 예외일 수가 없다. 꽃 하나하나가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다. 작은 꽃들의 피고 짐이 이어지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꼭 같은 꽃이 계속 피어있다는 착각으로 보일 따름이다. 먼저 핀 꽃이 져버리면 여럿으로 갈라진 꽃대의 아래에서 위로 뭉게구름이 솟아오르듯이 계속 꽃이 피어 올라간다.

 

 원산지 중국에서는 연보라 빛 꽃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중국이름은 자미화(紫微花)이며 우리도 흔히 그대로 따랐다. 당나라 때는 중서성(中書省)에 많이 심어놓아 아예 자미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백거이를 비롯한 중국의 옛 문사(文士)들은 이 꽃을 두고 글을 쓰고 시를 읊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강희안의 양화소록, 충신 성삼문의 한시에도 등장한다. 처음 들어 올 때는 분명 보라 꽃 배롱나무가 많이 들어왔을 것인데, 지금은 왜 대부분 붉은 꽃 배롱나무인지는 불가사의다.

 

 오늘날도 배롱나무 옛터의 명성을 잃지 않는 곳이 여럿 있다. 소쇄원, 식영정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밀집해 있는 광주천의 옛 이름은 배롱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이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 그 외에도 고창 선운사, 다산초당과 이어진 강진의 백련사,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경주 서출지(書出池) 방죽의 배롱나무 등은 아직도 꽃자랑이 대단하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는 특징 말고도 껍질의 유별남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오래된 줄기의 표면은 연한 붉은 끼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발바닥이나 겨드랑이의 맨살을 보면 간지럼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듯이 배롱나무 줄기를 보고 중국 사람들은 자미화 이외에, 파양수라 하여 간지럼에 부끄럽다고 몸을 비꼬는 모양과 비유하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껍질의 매끄러움에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진다고 '원숭이 미끄럼 나무'로 이름을 붙였다.

 

[우리숲 블로그 박상진 교수의 글과 그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