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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영희 교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악착같은 흔적’ 하나 더 남기고 떠난 장영희 [중앙일보]
유작이 된 수필집 『살아온 기적 … 』
 
 
“이 세상에서 나는 그다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평균적인 삶을 살았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평균 수명은 채우고 가리라. 종족 보존의 의무도 못 지켜 닮은 꼴 자식 하나도 남겨두지 못했는데, 악착같이 장영희의 흔적을 더 남기고 가리라….”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 중에서)
9일 타계한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평균 수명은 다 채우지 못했다. 대신 ‘악착같은’ 자신의 흔적을 오롯이 남기고 떠났다. 12일 출간 예정인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이 유작이 됐다. 고인은 3월 30일 출판사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한 원고를 넘기고, 입원 중에 마지막 교정지를 받아 4월 30일 검토를 마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그러나 책 인쇄가 끝난 8일에는 이미 의식을 잃은 그는 제본돼 나온 책을 펼쳐보지 못했다.
장 교수가 2000년 이후 월간 ‘샘터’에 연재한 글을 모은 이 책에는 생애 마지막 9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아홉해 동안 그는 보통 사람이 한 번도 감당하기 어려운 암 판정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런데도 2000년 출간된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서 보여준 따뜻한 감성과 여유로운 재치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시선엔 그 특유의 솔직함이 애틋하게 묻어나 있다.
“나는 참 많이 바깥 세상이 그리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공간, 그 속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늦어서 허둥대며 학교가서 가르치는, 그 김빠진 일상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을, 그렇게 아름다운 일을, 그렇게 소중한 일을 마치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히 행하고 있는 바깥 세상 사람들이 끝없이 질투나고 부러웠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중에서)
책 제목을 짓는데 유난히 집착이 강했던 고인은 이 책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한다”며 책 제목에 삶에 대한 희망과 강한 의지를 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프롤로그’ 중에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 세상으로 다시 나가리라. 그리고 저 치열하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그토록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소박한 흔적을 덤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내가 살아보니까’ 중에서)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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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암투병 소아마비 수필가 장영희 교수 별세 [조인스]  
 
암투병 중이던 수필가 장영희(서강대 영미어문·영미문화과) 교수가 9일 오후 1시 별세했다. 57세.
고인은 소아마비로 두 다리가 불편했지만 밝고 열정적인 삶의 자세를 수필과 신문칼럼으로 표현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영미 시를 쉬운 언어로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1년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하고 완치됐으나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다시 강단에 복귀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줬다.
암 치료 중에도『문학의 숲을 거닐다』『생일』『축복』 등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다시 간에 암이 전이됐지만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투병 중 집필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곧 출간된다.
고인은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고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한국번역문학상·올해의 문장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한국의 대표적 영문학자인 고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의 딸이다. 독신이며 유족은 모친 이길자 여사, 오빠 장병우 전 LG 오티스 대표와 언니 영자씨, 여동생 영주·영림·순복씨 등 네 자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13일 오전 9시. 02-2227-7550.
구희령 기자
소아마비와 암 이겨내고 기적을 살다 간 '소녀'
‘소녀’.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한다. 그처럼 맑은 감성을 지닌 어른을 본 적이 없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 소녀는 장영희(사진) 서강대 교수다. 우리 시대 대표 수필가이기도 하다. 9일 암 투병 끝에 5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사, 2009)
갓난아기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후유증으로 항상 목발에 의지한다. 사회는 그를 ‘1급 장애인’으로 분류한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그가 세상을 저주했을 것이라면 오산이다. 오히려 ‘정상인’과는 다른 체험을 유머와 위트로 승화, 문학적 재능으로 버무렸다. 수필과 신문 칼럼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 2001년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완치됐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고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다시 강단에 복귀했다. 그의 삶은 살아온 기적이었고, 사람들에게는 살아갈 기적이었다.
#『내 생애 단 한번』(샘터사, 2000)
“무미건조하고 습관화된 삶보다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해야 제 맛”이라는 게 그의 인생관이다. 삶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 “우리들 각자가 저자인 삶의 책에는 절망과 좌절, 고뇌로 가득 찬 페이지가 있지만 분명히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페이지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나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더 뜨거운 반응을 보낸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샘터사, 2005)
그는 영문과 교수다. 아버지(고 장왕록 서울대 명예교수)의 뒤를 이었다. 1975년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85년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생각하는 갈대』『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스칼렛』등을 번역했다. 중ㆍ고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으며 한국번역문학상과 올해의 문장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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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장영희 교수 추도사 [중앙일보]
고통 넘어 행복 만드는 삶 본받겠습니다


끝내 가셨군요. 장애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57년 동안 인생마라톤을 달려온 당신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드릴게요. 당신은 아름다운 승리를 했으니까요. 당신은 장애인에게 척박했던 그 시절 사회 편견과 맞서 장애인에게 굳게 닫혀있던 대학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왔죠. 그리고 모교인 서강대에서 교수가 됐고요.

그런 당신은 나를 비롯한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희망 그 자체였답니다. 당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난 당신이 미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너무나 완벽했으니까요.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를 뒀고, 영문학자로서 기반이 든든했고, 당신의 글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당신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당신이 양쪽 팔에 짚고 있는 목발은 장애가 아니라 당신의 그 모든 것을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답니다.

당신에 대한 부러움이 그런 미움을 만들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이 절필을 선언하는 글을 접했지요. 유방암이란 불청객이 찾아와 잠시 쉬어야겠다는 당신의 고백에 난 신문이 젖을 정도로 눈물을 쏟았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곧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당신 앞에서는 암도 꼼짝 못하는구나 싶었죠. 당신은 불행이란 단어가 뭔지 모르는 행운아란 생각이 들더군요. 언젠가 방송국 로비에서 당신을 만났어요. 너무나 반가워서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인 양 인사를 했죠. 당신도 나를 낯설어하진 않았어요.

실제로 만난 당신은 수줍음이 많고 사람의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수룩한 면이 있었죠. 한마디로 당신은 무공해인간이었어요.

당신이 척추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무척 화가 났어요.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너무 염치가 없다고 중얼거렸죠. 장애라는 짐을 줬으면 그것으로 끝내야지 무슨 암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생명을 담보로 장난을 칠 수 있느냐고, 인생에 최선을 다한 것도 죄가 되느냐고 신을 원망했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원망이 없었어요. 당신은 또 다시 이겨낼 준비를 했죠.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당신은 순간 순간 더 열정을 쏟았죠. 그런 당신은 장애인을 넘어 암으로 투병하는 환우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희망의 메신저였답니다.

지난해 1월,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요. 솟대문학 행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에요. 당신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래요. 내가 꼭 한번은 가보려고 했었는데, 어쩌죠? 지금 투약 중이어서 외출이 금지됐어요. 미안해요. 다음 솟대문학 행사 때 꼭 갈게요. 장애인 분들이 문학을 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인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정말 장해요. 방귀희씨.”

무심해 보이는 듯했지만 당신도 장애문인에게 사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져 코끝이 찡했답니다. 장영희 당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당신이 남긴 작품은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할 거에요. 그리고 장영희라는 여자가 살아온 역사는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이겨내고 어떻게 행복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잘 가세요. 장애와 암이 없는 나라로···. 


방귀희 <솟대문학 발행인 겸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