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지리산과 도교사상
지리산 마실
2007. 4. 4. 15:09
역사 속의 지리산(18)지리산과 도교사상 |
낙랑비서· 동의보감 중심에 지리산 있다...최치원·곽여·양예수 등 은거하며 도 터득 |
상고시대 천지가 개벽할 때도 침몰하지 않았다고 전하는 삼신산. 도교의 삼신산 중 하나가 방장산인데, 이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지리산을 북두의 4성 중 하나인 태일성의 신이 사는 곳이라 전한다. 태일성은 위진시대 기록에 ‘원시천왕’이라고 언급돼 있다. 그래서 지리산의 주봉을 천왕봉이라 하고 천왕봉의 선계에 오르기 위해 통천문을 거쳐야 한다. 고려조에는 이인로가 신선의 자취를 그리며 청학동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이렇듯 도교사상, 신선사상 하면 꼭 지리산이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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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최고의 신필 김명국이 그린 노인성의 신 수노인. | ||
한국의 선도는 고조선 시대 환인으로부터 시작돼 상고시대 선인으로 이어졌고 신라와 가야 산신과 고려·조선 선가가 그 맥을 이었다. 이렇게 이어진 ‘동방의 선맥’에는 지리산이 중심에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라시대 화랑의 우두머리 영랑과 현금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옥보고다. <청학집>에는 ‘사람의 나이 90이 되어도 안색이 어린 아이와 같았으며 노우관을 쓰고 철죽장을 짚고 산수 사이를 소요하며 단군의 선맥을 전했다’고 그가 묘사돼 있다. 또한 ‘일찍이 3천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수련했다’는 일화도 전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지리산 영랑재다. 화랑하면 떠오르는 최치원 ‘낙랑비서’의 그늘에 수련장소인 지리산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곽여(1059∼1130)는 예종의 총애를 받다가 궁중생활에 염증이 나 지리산에 은거한다. 이어 고려말에는 한유한이 그 맥을 잇는다. 그는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지리산 덕산 사륜동과 악양면 평사리에 터를 잡아 은거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소두자 이유가 지리산 자초동에 은거한다. 매일 양생술을 익혀 천 번씩 빗질을 해 도를 터득했다고 한다. 이유와 함께 이방보는 지리산의 약초를 캐 선단을 제조했다고 전한다.
이밖에 장산인으로 널리 알려진 장한웅은 도교경전이자 의서로도 유명한 <수진십서>를 입수해 수련했다. 이어 소설 <동의보감>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양예수가 그의 가르침을 잇는다. 양예수는 <동의보감> 편찬에 직접 간여한 인물로 <이향견문록>에 따르면 장한웅의 제자로 도교의학을 성취했다고 한다. 도교의학서 허준의 <동의보감> 이면에도 지리산의 도교사상이 있었던 것이다.
△‘장수의 별’ 노인성과 함께 하는 곳
지리산 법계사에서는 춘분과 추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장수의 별 ‘남극성’을 편히 앉아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이 북방에 있어 사람의 죽음을 다스린다면 남두칠성은 남방에 자리해 삶을 다스린다. 남두칠성 가운데 광도가 높은 첫 별이 이른바 ‘남극노인성’인데 노인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도교에서는 남극장생대제라 해 숭배했다.
<사기> <천관서>에 따르면 노인성이 나타나면 나라가 태평하고 나타나지 않으며 병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고대 천문학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맡아보는 별이라고 해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믿었다.
신선 그리기를 좋아했던 조선 최고의 신필 김명국은 장수를 상징하는 노인성의 신 수노인을 그리기도 했다. 긴 머리를 한 노인 옆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까지 등장했으니, 여느 대가집 그림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지리산에서 ‘노인성 제사’가 시작됐다고 전하며 현재 춘·추분 법계사를 찾는 민간인의 발길이 그 맥을 잇고 있다.
도움말/안동준 교수(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