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지리산 개관-대지모신(大地母神)의 산

지리산 마실 2007. 2. 14. 09:58
■우리의 산하를 다시 걷다. 대지모신의 산, 지리산
[경향신문]
 
“지리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라 부른다. 꽃봉오리 같은 산봉우리들과 꽃받침 같은 골짜기들이 백두산으로부터 연면히 흘러내려와 솟구쳤기 때문이다.”

고려 문인 이인로의 설명이다. 지리산 속에 백두산이 머물러있는 형국이라 하여 ‘두류산(頭留山)’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지리산 시인과 ‘제1문’ 초행길-
가을걷이를 끝낸 지리산 자락의 다랑이논. 반달배미 삿갓배미 사닥다리논 배꼽논 등 계단식 전답들은 산촌민들의 억센 삶의 문화사를 보여준다.

단풍의 남하 속도는 하루에 25㎞ 걸음이라 하는데 이 또한 설악 아니라 백두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겠다. 한반도의 거대 녹색공간이 바야흐로 ‘만산홍엽’으로 열정과 황홀을 불태우려 한다. 그냥 지리산이 아니라 감탄사를 붙인 ‘아! 지리산’이 사람들의 가슴마저 뜨겁게 달군다. ‘애타는 사랑의 절규’는 올해에도 예외 없이 ‘절정의 지리산’에서 포화상태를 이루어가는 터이니, 부랴사랴 길을 나선다. 지리와 섬진의 산하를 다시 걷는다.

높은 산, 넓은 산, 깊은 산을 합쳐놓은 것이 지리산 아닌가. ‘높은 산’의 답사가 우선순위이겠지만 오히려 ‘넓은 산’의 만보와 소요를 만끽하시라. ‘깊은 산’의 심방으로 나 자신을 실종시키는 일탈과 전복의 ‘입산’이야말로 실은 가장 소망하고픈 바이기도 하다.

‘지리산 제1문’이라는 푯말을 붙여놓고 있는 잿길이 새로 생겼다. ‘오도재’는 2003년 11월30일 개통되었다는 2차선 포장도로다. 함양에서 휴천면 월평리를 넘어 곧바로 칠선계곡과 백무동 계곡으로 닿게 한다. ‘지리산 시인’ 정규화의 동행과 안내가 아니었더라면 이 들머리로 찾아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초행길’인데 축지법으로 남악(南岳)을 끌어당기고 있는 느낌이지만 길이 곰살궂은 쪽은 아니다.

지리산의 북녘 기슭이 되는 남원 함양 쪽을 흔히 ‘외지리’라 하고, 구례 하동 산청 쪽은 ‘내지리’라 한다. 지리산이 워낙 크고 넓은지라 바깥산과 안쪽산의 기후는 뚜렷하게 다르다. 식생과 풍토에서마저 차이가 나서 가령 녹차의 차밭은 남녘 산자락에만 조성된다. 북향의 의탄 마천 일대 산기슭에는 벌써 가을걷이를 끝낸 다랑이논들이 허전하게 황금빛을 내뿜고 있다. 반달배미 삿갓배미 사닥다리논 배꼽논 등등 호칭마저 제각각이었다. 이러한 계단식 전답들은 ‘토지 기근’에 겨워하던 산촌민들의 억센 삶의 문화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지리산 토박이들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중일까. 더러는 묵혀두어 아예 황폐해지고 무너져버린 다랑이논들도 눈에 띈다.

바래봉 정령치 만복대 쪽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전망은 장관이다. 반야봉과 노고단이 맞물리면서 추녀마루의 형태를 만든다. 그리하여 아득하게 천왕봉으로 닿는 능선 모습이 우진각지붕을 빼닮았다는 어떤 산악인의 관찰에 공감했던 적이 있다.

삼남 땅을 감싸는 큰 지붕이 곧 지리산이다. 이번에는 또다른 스카이 라인을 찾아냈는데, 금대산 금대암이라는 전망대다. 노고단 벽소령 세석고원 장터목 천왕봉이 한 아름에 들어오는데. ‘청춘산맥’이라고 내가 말하니 동행들이 웃는다. 산청에 있는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에서 올려다보는 지리산 능선의 눈맛과는 완연히 다르다.

-여인수난사 ‘대지모신을 찾아서’-

#성모의 산, 늙은 할미의 산
천왕봉 아래 장터목에서 바라본 지리산 운해. 지리산 운해는 지리산 8경중의 첫째로 꼽힌다. 구름바다 넘어 지리산맥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고단 턱밑의 성삼재는 지리산 관통도로로 인해 항상 분주해졌지만 옛날 걸어 올라가던 때가 훨씬 좋았다. 지리산 8경 중의 첫째는 ‘노고단 운해’이다. 박현채·고은 등 일행과 함께 구름바다 넘어 무등산 백아산 쪽을 막막하게 바라만 보던 때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내가 처음 지리산에 들어와 본 것은 1968년이었고, 처음 천왕봉에 올랐던 것은 73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통천문 넘어 천왕봉 오르는 바위너설에 늙은 할머니 모습의 ‘석상’이 놓여 있었다. 혹자는 ‘지리산 성모상’이라 하기도 했지만 귀티라고는 전혀 없고 포한을 뱉어내는 표정이 서럽기만 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1472)’에는 천왕봉에 올랐다가 내려올 적의 일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 성모에게 잔을 올렸다. 천지가 맑게 개어 산천이 활짝 열린 것을 사례하였다.”

대유학자의 배례를 받아 잡순 ‘지리산 성모’는 누구인가.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봉안한 것이라는 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우리 역사의 산악숭배는 고래로부터 ‘신앙적’이었다.

천왕봉의 ‘성모’는 노고단에 이르러서는 ‘노고(老姑)’가 되고 백무동에서는 ‘8도 무당의 원조’가 되고 있다. 지리산의 신령스러움을 믿는 이들이 산천기도를 위해 산짓당(山祭堂)과 굿당을 몰래몰래 차려놓곤 하는 탓에 국립공원 측에서 성가셔 한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진감국사비

성모(Holy Mother), 태모(Great Mother). 모계사회에서는 ‘아버지’란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성스러운 어머니’는 ‘위대한 아들’의 위대성을 알리게 하는 상징체계가 된다. ‘성모의 산’ 지리산은 사라져버렸을까, 잃어버렸을까.

지리산 일대의 숱한 장승들 중에서 나는 실상사 입구의 ‘할머니 장승(下元唐將軍)’을 찾곤 한다. 이 장승에서 나는 ‘한국여성문화사’를 찬찬히 읽게 된다. 세파에 시달리고 가난에 찌든 몰골인 것은 ‘민중 자화상형 장승’이니만치 당연하다. 볼록 튀어나온 왕방울 눈과는 대조적으로 이빨마저 다 빠지어 빼뚤한 곡선으로 가볍게 처리된 호물때기 입술에 편안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여성성’은 미(美)와 풍요와 다산을 함께 표상하는 것이거니와 ‘할머니 장승’은 이러한 ‘여성 능력’을 모두 바치고 헌신하여 오히려 홀가분해하는 듯싶기만 하다. 이 할머니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제대로 판독해야 할 ‘성모’와 ‘노고’와 ‘보살’의 후예가 되는 것 아닐까.

‘여성생태주의’가 21세기의 인류에게 요청된다 한다. ‘남성성의 지리산’만 아니라 여성생태문화 찾기 테마기행, 곧 ‘대지모신성의 지리산 순례’를 마련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최치원이 노닐던 ‘삼신산의 꿈’-

#구름 위 다락의 거문고 소리

지리산의 대지모신성은 길지와 낙토를 사람들에게 베푼다. ‘어머니 젖가슴’의 비옥하고 풍요로운 대농촌 곡창지대가 세 방면에서 펼쳐진다. 구례군 토지면 사도리는 지리산에서 득도한 도선 국사가 하산하여 섬진강변 모래바닥(沙)에 풍수지리의 그림(圖)을 그려 보였다는 명당인데 ‘시인마을’이 생겨나고 있다. 하동군 악양면은 박경리 소설 무대인 평사리로 유명세를 타지만 ‘악양루’에는 한국 선도(仙道)와 관련되는 인물들의 사연이 서려 있다. 그리고 하동군 옥종면은 고려시대로부터 명문거족들의 배출지가 되는데, 6·25 빨치산 시절에는 그러한 ‘대농촌성’이 화근이 된다. 많은 희생자를 냈던 곳이었고 ‘남부군’ 이현상 부대의 최후 보투(보급투쟁) 지역이기도 했다.
실상사 입구 ‘할머니 장승(下元唐將軍)’

화개면 정금리에는 ‘걸어 나오는 산’ 전설이 있다. 지리산이 걸어 나오는데 성급한 아낙 때문에 산이 걸음을 뚝 멈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유토피아’가 깨졌다는 것인데, 이번 기행의 마지막으로 나는 ‘들어가는 산’ 지리산의 깊음 속으로 빠진다. 칠불사에 ‘아자방(亞字房)’이 복원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절의 연못 위쪽에 옥보고의 ‘운상원(雲上院)’이 있었을 것이라는 ‘즐거운 주장’을 해본다. ‘구름 위의 다락’에서 뜯는 거문고를 나는 ‘노래의 날개’를 펼치어 듣는다.

최치원이 노닐던 사원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에는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나 또한 지리산의 또다른 이름인 방장산의 삼신산으로 올라가는데, ‘진감국사비’의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아울러 쓴 것이다. 비문 속에 들어 있는 그의 친필인 ‘최치원’이라는 이름 세 자를 영상 촬영하여 신문에 내보내기로 한다. ‘삼신산의 꿈’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박태순·소설가/사진·황헌만〉
[경향신문 기사에서 옮김]

[註]대지모신(大地母神) : 인류 초창기는 여성 중심의 사회, 곧 모계사회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생산해 내고, 만물을 자라게 하는 대지를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신으로 숭배했다. 이러한 신을 대지모신(大地母神) 또는 지모신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