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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늦가을 고독 즐기기/한승원
지리산 마실
2005. 11. 14. 11:29
[아침숲길] 늦가을 고독 즐기기 /한승원 |
뒷산 기슭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개 옻나무의 단풍이 곱다. 진홍색 적갈색 황갈색이 고루 섞여
있다. 그것들은 연한
황금색의 싸리나무숲과 회갈색의 억새숲을 배경으로 늘어서 있다.
그 단풍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 단풍은 어떤 색깔일까. 황금색일까. 주황색일까. 황갈색일까. 갈색일까. 회갈색일까.
나는 도리질을 한다. 단풍들고 싶지 않다. 땅에 떨어져 갈색으로 변하여
바람 따라 흘러가고 싶지
않다. 내 잎사귀들은 아직 연두색이거나, 청솔잎처럼 검푸르게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나목이 된 호두나무의 가지 끝에 붙어 있는 한 개의 황갈색 잎사귀가 바람에 팔랑거린다. 떨어 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여 매달려 있는 듯 싶다. 토굴 마당의 감나무들은 벌써 흑갈색 나목이
되었고, 붉은 감 여남은
개를 달고 있다. 마당에 깔려 있는 갈색 잎사귀들이 을씨년스럽다.
신라의 월명 스님이 노래한 '제망매가'가 생각난다. '삶과 죽음의 길 이승에 있음이 두려워서/ 나는 갑니다, 하는 말도 못하고 떠나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곳저곳에 떨어지는 잎같이/ 한 가지에 나가지고 가는 곳 모르는구나. /
아, 그 영원한 곳에서
만나볼 그날을 위해/ 내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선인들은 가을을 이별의 슬픔으로 노래했다. 그것은 생이별이기도 하고 사이별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은 우리들을 낭만의 세대라고 불렀다. 배고픔과 가난을 즐기고 부자 되기를 포기한 채 시나
소설을 써서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그리고 낙선을 한 다음,
안주 없이 소주를 마시고,
모래밭을 질주하고, '굳세어라 금순아'를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부르며
거리를 헤매었다.
이튿날 싸구려 술로 인하여 두통을 앓으면서, 이제부터는 죽어도 술 안 마셔, 하고 맹세해 놓고 그날 해가 떨어지자마자
다시 그 술을 원수진 듯이 마셨다. 가난한 나를 버리고 떠나간 사람을
생각하며 이를 악문 채
멋진 복수를 꿈꾸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시와 소설을 쓰기도 하다가,
깜깜한 방 안에서 촛불을
밝혀놓고 자기 고독을 끌어안고 울었다.
늦가을 달밤이면 휘파람을 불면서 쑥대처럼 긴 머리카락을 찬바람에 휘날리며 강둑을 걷거나 바 닷가를 헤매고, 박목월
작시의 이별노래를 구슬픈 목소리로 불렀다.
내 시간의 창고 속에 들어 있는 그 슬픈 회억들. 저녁밥에 포도주 한 잔을 곁들여 마시고 얼근해 진 채 토굴로 올라오면서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산들 불어 가을은 깊은데/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산천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혼자 울리라/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가로등 불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컴컴한 길을 올라오는데 등 뒤쪽에서 달려온 바람이 가랑잎들을 우르르 들쥐떼처럼 몰고 간다. 저놈들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늘을
쳐다본다. 명멸하는 별들
속에서 내 별을 찾는다. 나를 사랑하다가 떠나간 사람들이 된
별.
토굴 마당 한가운데서 발을 모둔다. 최후의 승리자는 가장 오래 살면서 자기 일을 꾸준히 끝까지 해낸 사람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귀뚜라미가 돌 틈에서
운다.
'이 사람아, 시방 나 이렇게 나의 살아 있음을 찬양하고 있다. 외로워하지 마라, 이 세상에서 외로운 것이 너뿐인 줄 아느냐, 나도 외롭다. 존재하는 것들은 다 외로운 법이다. 외로운 눈으로 세상을 냉엄하게 보면서 살아가라고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몸을 웅크리게 한단다'. 귀뚜라미의 말을 따라 몸을 웅크리자 살갗에 가시 같은 소름이 돋는다.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 가시복이 된다. 모든 고독한 자들은 가시복처럼 온몸에 가시가 돋는다. 속에도 가시가 돋아 내출혈을 하게 된다. 내출혈을 경험한 자들은 어떠한 값싼 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 건강하게 살면서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나의 고독을 사랑하고 즐겨야 한다. 소설가 [국제신문
아침숲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