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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

화엄사 효대(孝臺) 이야기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화엄사 효대(孝臺) 이야기 [화엄사 효대. 사사자삼층석탑(중앙)과 석등(왼쪽)이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에는 배례석 2기가 있다. 석탑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견성전이다.] 지난 9월 말, 화엄사 사사자(四獅子)삼층석탑(국보35호)이 7년여에 걸친 보수복원공사 끝에 일반대중에게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6년 전 들렀을 때 보호펜스 안에 해체된 석탑부재가 널브러져 있었고, 2017년 연말까지 복원공사가 끝날 것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돌렸던 적이 있었는데, 무려 4년이나 더 걸려 불사가 완료된 것이다. 화엄사 홈페이지에는 각황전 뒤 언덕에 네 마리의 사자가 탑을 받치고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을 효대로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석탑 맞은편 석등이 함께 공간을 이루는 언덕 전체를 효.. 더보기
숙성치(宿星峙) 이야기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숙성치(宿星峙) 이야기 남하하던 백두대간 마루금이 여원재를 지나 지리산 고리봉에 닿으면, 그 유장한 흐름을 지리산이 이어받게 된다. 그런데 천왕봉을 향해 달리던 백두대간 지리산 산줄기가 만복대 이르기 직전에, 서쪽으로 가지를 치는 또 하나의 마루금이 있다. 이른바 ‘견두지맥’이다. 현재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의 경계를 이루는 이 산줄기는 예전 남원부 관내의 주천방과 산동방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숙성치는 이 산줄기 상에 있는 고개이다. 숙성령으로 부르기도 한 이 고개는 신증동국여지승람(16세기)과 용성지(18세기)에 “숙성현(宿星峴) 부(府:남원부를 말한다)의 동남쪽 30리에 있다”라는 동일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지금은 고개를 넘나들던 길로서는 이어지지 않은 채, 능선의 산길을.. 더보기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⑤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⑤ 두류암에서 하룻밤을 묵은 유몽인 일행은 4월 4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옹암(甕巖)으로 오른 뒤, 청이당-영랑대-소년대를 거쳐 천왕봉으로 향했다. 오늘 날의 지명으로 독바위-쑥밭재-하봉-중봉-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코스’로 이동한 것이다. 거대한 바위 형상이 멀리서 보면 단지(독)처럼 보인다고 해서 독바위라고 불리는 옹암은 독녀암(獨女巖)에서 이름이 유래한 함양독바위와는 이렇듯 그 의미가 다르다. 유몽인은 예전 본고에서 소개했던 ‘점필재길’의 ‘구롱-청이당’ 코스를 따르지 않고, 이렇듯 능선으로 올라 청이당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천왕봉에 도착한 유몽인은 동행했던 승려가 가리키며 알려주는 대로 사방을 조망하며 일일이 봉우리와 지역 이.. 더보기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④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④ 1611년 4월 2일(음력) 유몽인 일행은 저물녘에 군자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보낸다. ‘들판에 있는 사찰이라 마루에 흙먼지가 가득하였다’라며 절집의 첫인상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유몽인은 ‘절 앞에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로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로 부르는데, 무슨 뜻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라며 절집 내력 설명도 왠지 마뜩치 않은 모습이다. 그러더니 신선처럼 선계(仙界)에 올랐다가 다시 속세로 떨어져 정신이 답답해졌고, 급기야 밤에는 가위눌림 당하는 악몽까지 꾸었다며 산에서 내려온 후 불편해하는 속내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1643년 8월 22일(음력) 안의현감 박장원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이곳에 들렀을 때는.. 더보기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③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의 지리산 유람③ “월락동을 거쳐 황혼동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유두류산록」, 최석기 외 번역) 음력 4월 2일(양력 5월 13일) 아침, 지금의 와운마을 인근 어딘가로 추정되는 월락동‧황혼동을 지나 골짜기로 들어선 유몽인 일행은, 곳곳에 쓰러져 가파른 돌길을 막고 있는 거대한 고사목의 가지를 제거하거나 비켜가느라 엄청 힘든 산행을 하였다. 또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라는 표현으로 보아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졌을 것이다. 이날 유몽인 일행.. 더보기